멸종 위기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어왔었다.
난 지금까지 이 말이, 산업혁명 이전까지 잘 지내왔는데, 근래 들어 동물들을 멸종위기에 빠트렸다고 이해했었다.
그런데, 우리 사피엔스종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7만 년 전부터 맞닥뜨리는 모든 동물을 멸종이나 멸종에 준하는 수준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같은 '속'에 속하는 네안데르탈인, 직립원인부터 호주의 대형동물들, 아메리카의 대형동물들을 멸종시킨 장본인의 후손이라는 것이 좀 놀라웠다. 살인마인줄은 알았지만, 연쇄살인마였을 줄이야...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마주치는 족족 동식물과 자원을 아작 내는 거 보면,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이 레오에게 얘기한 것처럼 인간은 자원을 고갈시키고, 자멸하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책에서 보면 수렵채집에서 농사로 넘어가는 것을 발전이 한 형태로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가 발전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엘리트를 제외한 개개인들에게는 삶의 질을 낮추는 것이었다는 시각 또한 흥미로웠다. 단순히 한 곳에 정착해서 큰 공동체를 이뤄서 살면 수렵채집인의 삶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반 농부의 경우는 일은 훨씬 고되게 하면서, 보상은 적어졌으니 더 고단한 삶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TV에 나오는 조금 여유 있는 몽골 유목민의 삶과 보릿고개를 힘겨워하던 우리 선조들을 비교하는 것과 비슷할까?
우리가 밀을 키운 것이 아니고, 밀이 우리를 밀 재배자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역시 충격적이었다. 아주 작은 지역에서 자라던 밀이 인간의 도움을 받아 재배지를 넓혀나가서, 지구 표면의 상당 부분을 접수하여, 결국 70억 인류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 밀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성공한 투자고, 대단한 업적일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남는 게 많이 없는데, 이 책은 남는 게 아직 더 있다.
인지혁명에 관한 이야기. 사피엔스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되면서 다른 모든 호모 속의 인류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 수렵채집인의 한계는 20~50명, 대화를 통해 관계를 이룰 수 있는 최대 인원은 150명 그러면 더 많은 무리를 하나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가, 민족, 종교라는 것이 상상 속의 개념이라니? 그 개념들로 뭉칠 수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다니? 아 이런 생각들, 통찰력.. 대단하지 않나? 막연하게 생각했던 인간의 발전과정이 이 개념을 대입하면 뭔가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국가, 민족, 종교라는 개념들이 만들어내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는 계속 느끼면서 살아가지 않은가? 로마제국, 대영제국, 종교전쟁, 민족주의. 사피엔스는 그 개념으로 성공할 수 있었기에, 그 개념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과학혁명과 제국의 연관성. 왜 유럽인들이 세계를 정복했는가? 유럽인들은 어떻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과학의 기본자세를 체득할 수 있었는가? 그 당시 전 세계 GDP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중국은 그러지 못했을까? 이 정도면 유전자가 다르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되는 건 아닌가? 많은 대답을 얻었는데, 질문도 그만큼 많아졌다. 뭐 이따위 책이 다 있어?
흔히 인간이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있다고 말한다. 힘도 세고, 욕심도 많고 그럴만하다. 우리 유전자는 200만 년 중에 199만 년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다. 수렵채집인의 유전자 행동이 그대로 남아 당분만 보면 많이 먹어서 축적하려고 한다. 수렵채집 당시 당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일 밖에 없었기에, 발견하는 즉시 최대한 많이 먹어두려는 행동에서다. 먹이사슬에서의 위치도 고기를 먹는 사자, 남은 고기를 발라먹는 하이에나, 찌꺼기를 먹는 독수리 마지막으로 뼈를 쪼깨 골수를 빼먹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200만 년 동안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있었다. 그러면 얼마나 눈치를 많이 봤겠는가? 아무것도 못 먹을지 모른다는 걱정, 다른 동물이 오기 전에 먹어야 한다는 조급함, 먹이를 먹다가 다른 동물에게 잡아 먹힐 수도 있는 극도의 두려움.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최하위 개체의 습성들. 이 상태로 최상위 포식자로 단기간에 올라버렸다. 무슨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 의심과 걱정에 사로잡힌 폭군.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른다. 잡히는 대로 죽인다. 먹고 싶지 않아도 죽인다.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있었을까? 수많은 호모 속 중에 사피엔스만 살아남은 것이 그 증거 아닐까? 마주치는 동물들마다 멸종하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결국 그런 것들이 내부로 향한다면 사피엔스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질문을 많이 하게 하는 책이다. 기억에 남기려 노력하지 않아도 많은 것이 남는 책이다.
꼭 읽어보시라.
아 그리고 1500년대에 유럽에서 출간된 지도를 한번 봐라. 유럽과 북아프리카, 아메리카가 어떤 식으로 표현돼 있는지. 대동여지도 최고라고 여겼던 나에게 이것도 좀 많이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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