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난 노는 것에 진심이었다.
매일 오늘은 어떻게 놀까만 고민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전공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내가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는 비전공자인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IT전공자였던 나보다 걔네들이 아는 전공용어가 훨씬 많았으니까. 그래도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IT 쪽으로 취업할 생각이 없었으니까.(그냥 취업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내가 IT계통의 일을 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나는 부서 직원들이 모이는 자리가 두려웠었다. 당시에는 부서 사람들끼리 으쌰으쌰 하는걸 제일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라 티타임이 많았다. 신변잡기에서 시작한 티타임은 전공에 대한 얘기로 확장됐고, 그때부터 지식 뽐내기가 시작됐다. 나름 얼리어답터라 불리던 직원은 영어줄임말, 신조어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사람들에게 말을 잘한다고 평가받는 나였지만, 이 시간만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잘 모르는 전공용어가 나오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설프게 아는 척을 해야 했다. 무시당하기는 싫었으니까. 등에선 식은땀이 났고, 대화의 끝에는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가능하면 전공분야 얘기를 안 하려고 노력했고, 그런 자리를 피해 다녔다. 그러면서도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당히 시키는 일하다가 맛집으로 어느 정도 소문난 어머니 가게를 물려받아 편하게(식당일을 편하다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알 수 있다) 살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난 새로운 삶을 찾는 진취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살았다. 티타임이 이럴진대, IT회의는 말해 무엇할까? 그 시절의 난 그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해가고 있었다.
세상이 변화가 어떤 사건에 의해 발생하듯, 나의 변화도 어떤 사건으로 시작됐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첫째가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아이가 생긴다는 건 너무나도 감동스러운 일이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기준을 바꿔버리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많은 것이 변했는데, 그중에서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내 뇌리에 깊게 박혔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아이에게 너무 부끄러웠다.
뭔가 달라져야 했다. 근데 뭐부터 시작해야 될지 몰랐다. 사람들과 대화를 잘 이끌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먼저 전공용어를 많이 알아야 했다. 그래야 적재적소에 그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테였다. 그리고 신기술에 대해서도 민감해져야 했다. 앞서 말한 얼리어답터들이 그랬다. 나도 얼리어답터가 돼야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시기에는 아직 '마이크로 소프트웨어'(마소라 불렸다. 처음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출간하는 줄 알았다)라는 IT전문잡지가 발간되고 있었다. 잘 나가던 월간지였었는데, 그즈음엔 2개월에 한 번씩 출간되고 있었다. 그 이후 더 발행기간이 늘었다가 결국 발간을 멈췄다.
어쨌든, 무작정 그 책을 구독했다. 다음호가 나오기 전까지 책을 정독하자는 생각이었다. 책은 얇은 편이었는데, 폰트가 작아서 내용이 만만치는 않았다. 처음 책을 꺼내 들었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 절반이 넘었다. 모르는 용어도 많았다. 특히 영어로 된 거.
그냥 계속 읽었다. 읽다 보면 쌓이겠지, 쌓이면 이해되겠지. 무식한 방법이었던 것 같은데,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책 한 권을 다 읽었는데, 별 차도가 없었다. 그다음 호부터는 내용을 두 번씩 읽었다. 블로터, IT World와 같은 IT 전문 사이트가 읽기 목록에 추가됐다. 블로터에는 용어해설 코너가 있었는데, 양이 많지 않고, 내용이 알찼다. IT World에는 신기술에 대한 소개가 많았다. 기도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쌓여라~ 쌓여라~ 제발 쌓여라~~. 구멍이 넓은 채라도 밀가루를 확 부으면 쌓이듯이, 지식을 확 부으려고 노력했다.
애기가 생기면 본인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극적으로 줄어든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한두 시간의 자유시간이 있었는데, 아이를 낳으니, 자유시간은 고사하고 잠잘 시간이 줄어 업무에 부담이 올 정도였다. 난 그 상황에서 공부라는 걸 시작해야 했다. 총각시절 아무 생각 없이 날려버린 시간들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 하고 집에서 뒹굴거렸던 시간. 그 수많았던 웹서핑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도 어떻게 쥐어짜든 시간을 만들어 내야 했다.
잠을 줄였다. 하루 8시간이었던 수면시간은 아이를 낳고 7시간 이하루 줄어있었다. 그걸 다시 6시간 이하로 줄였다. 커피를 때려 넣기 시작했다. 원래 속이 민감해서 커피를 마시면 속이 쓰리고, 설사를 했었다. 그래도 커피를 안 마셔 버릇해서 그런지, 마시기만 하면 잠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많은 공부법이 있는데, 아빠공부법도 꽤나 괜찮은 것 같다. 열정이 솟아나고, 의지가 살아난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만들고, 공부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참 머리에 안 들어오더니, 3개월쯤 되자 잡지에서 읽은 내용, 블로터의 용어공부내용, IT World의 기사 내용이 융합되기 시작했다. 책 읽기가 수월해지고, 용어공부가 쉬워지고, 기사도 눈에 잘 들어왔다. 1년이 지났을 때는 내가 티타임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전공용어가 두렵지 않았다.
전공용어에 대해 확실하게 알게 되자 많은 부분을 알게 됐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같은 용어를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예전의 나처럼 몰라도 그냥 머리를 끄덕거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다른 사람보다 한 발만 앞서면 많이 아는 것처럼 뻐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정말 아는 만큼 보였다.
노력을 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지, 아이 아빠가 되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때의 나처럼 IT 전공자임에도 다른 IT 전공자들과의 대화가 힘든 사람에게 얘길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별건 아니다. 100일 하루 두 시간 정도만 꾸준하게 하면, 남은 10000일(혹은 그보다 짧은)의 직장생활이 훨씬 편안해질 수 있다. 내가 편해졌듯이,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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