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실에서 나는 경쾌한 멜로디가 세탁이 끝났음을 알렸다.
10 년 가까운 나이를 살아온 세탁기는 여행 후 쏟아져 나오는 빨래를 계속해서 처리해 내고 있었다. 이제 한 번만 더 돌리면 빨래는 끝이다. 빨리 돌려놓고 쉴 생각에 마음이 조금 설랬다. 어제 나온 카지노의 새로운 에피소드가 폰 안에서 날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조금만 기다려라. 설레는 마음으로 세탁기 뚜껑을 열었을 때, 난 카지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세탁기 안은 투명한 젤리로 엉망인 상태였다. 몇 번의 경험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세탁기 속에 들어가선 안될 것이 들어갔다는 것을. 누군가가 세탁물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세탁기 속에 퉁퉁 불어 옆구리가 터진 기저귀가 투명한 젤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흡수력이 좋긴 좋구나. 저렇게 물을 많이 머금은 것을 보면. 투명 젤리 성분은 뭘까? 아이들에게 해는 없는 걸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잠시 후 이 빨래를 넣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런 상황이 세 번째인걸 깨닫자, 단전에서부터 무언가가 솟구쳤다. 입을 열지 않으면 머리를 뚫고 지나갈지도 모르다는 생각에 입을 벌려 열기를 쏟아냈다.
여보!!!!!
난 빨랫감을 넣을 때, 하나하나씩 확인해 보면서 넣는 반면, 와이프는 빨랫감을 뭉쳐서 통으로 넣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 둘째의 기저귀가 함께 딸려 들어가곤 했다. 처음 한 번은 웃으면서 넘겼다. 그럴 수도 있다며 위로해 줬다. 두 번째 기저귀가 세탁기에서 발견됐을 때, 저번에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 게 문제였을 수 있겠다 싶어, 약간 정색하고 얘기를 했었다. 빨래를 넣을 땐 하나하나씩 확인해 보면서 넣으라고. 나 역시 더 신경 쓰겠다고.
와이프는 목소리의 위치와 크기를 보고 사태를 바로 파악한 것 같았다. 바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너무 발 빠른 대처에 공은 바로 나에게 넘어왔다. 난 기로에 섰다. 더 화를 낼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화를 멈추려고 시도해 보지만, 치솟아 오른 화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한참 오래전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의 강의를 본 적이 있다. 주제는 대략 '화로부터도 도망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화가 날 땐 빨리 공간을 바꾸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건 확실히 떠올랐다.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건 행복한 우리 집을 순식간에 지옥도로 만들 수 있었다. 아이들과 즐거웠던 여행의 마무리를 망쳐버릴 수 있었다. 발 빠른 행동이 필요했다. 잠시 운동 갔다 온다는 얘길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계속 걸었다. 다리에 아픔이 느껴졌을 때, 내부 진화가 거의 마무리 됐음을 알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이들이 '아빠~~~~'를 외치며 달려왔다. 평상시에 그 정도까지의 반응은 아닌데, 엄마의 지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집안은 나갈 때 보다 깔끔하게 정리 돼 있었다. 젤리를 뒤집어쓴 세탁물들은 다시 목욕재계를 하고 있었다. 다시 헹군다고 젤리가 깔끔하게 씻기진 않겠지만, 건조기를 강하게 돌리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터였다. 옷감이 상하는 건 마음 아프지만, 마음이 상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오늘 난 가정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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