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난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다.
말을 곧잘 하고, 유머 감각도 있었기에, 내 빠른 눈치는 당연하거라 생각했다. 모임의 분위기, 상대의 기분, 그에 따른 내 반응 역시 내 계산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다. 심지어는 내 눈치를 확신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연애를 할 때 항상 상대를 다그쳤다. 난 다 알고 있으니까. 궁예의 관심법 같았으려나.
시간이 한참 지나 생각해보니, 눈치 없이 한 행동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매일, 자주 부끄러움에 치를 떤다. 난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눈치를 보면서 사는 쪽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엄마의 매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중학교 때, 2년에 걸친 학교폭력이 날 그렇게 만들었을까? 가난하고, 또래에 비해 작고 힘없는 아이가 무차별적인 폭력을 피해 살아간다는 것은 극도의 눈치가 필요한 일이었을게다. 조용히 엎드려 숨죽이고,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랬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내 얼굴이 더 불쌍해 보일까를 고민하면서.
얼마 전에야 알았다. 내가 얼마나 눈치 없는 인간이었는지를.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했었는지를.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은 지금에서야, 쥐꼬리만한 눈치로 나를 살펴볼 수 있게 됐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10년이 지나 지금을 돌아보면 쥐꼬리만한 눈치 역시, 눈치 없음의 하나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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